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후반생 (1526~1546) === 1525년 이후의 루터의 행적은 일반 역사서에서나 [[종교개혁]]을 다룬 서적에서까지 거의 나오지 않는다. 1525년 농민반란이 진압되고 민중의 지지를 잃자 거의 역사에서 퇴장한 취급이다. 그러나 루터는 20여년을 더 살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먼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자신이 거주하는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에서 새로운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독일 미사와 예배규정≫을 저술했고, 작센 선제후국에 개신교 지방교회(Landeskirche)를 설립하는데 주력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의 사명을 받아들였다. [[종교개혁]]을 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게, 작센의 새 교회는 [[예수]]- [[12사도]]- [[사도 바울]]-[[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올바른 옛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전승한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가톨릭]]에 대해선 [[사도전승]]과 교회전통이 끊어진 '''거짓된 새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루터교회]]라는 명칭 자체는 거부한 게 맞다. 가톨릭교회의 명칭인 [[보편교회]][* [[그리스어]] ''katholos''의 '일반적', '포괄적'이라는 의미서 유래](가톨릭)이란 용어도 쓰지 않았다. 앞서 농민전쟁 때 비판받았던 '두 정부론 (두 왕국론)'의 연장선상으로, 교회는 교황청처럼 중앙집권적 조직이 아니라 각 제후와 영주들이 다스리는 지방 또는 지역 교회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터교회]]라는 명칭에 대해 루터의 의견은 이렇다. >사람들이 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를 >형제들은 자신을 루터적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적이라고 하기를 바랍니다. 루터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교리는 절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녀가 제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을, 이 가련하고 냄새나는 사멸한 육신인 제가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우리 편파적인 이름을 버립시다. >우리를 그리스도 교도라고 부릅시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와 교회는 반대편에게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 '루터 추종자(Lutheran)'란 말로 불렸고,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 역시 가톨릭 신자들을 로마와 [[교황]]의 숭배자라며 '로마 추종자', '교황 추종자'라고 부르면서 각자 '루터교도'와 '[[가톨릭|로마교도]]'로 불리게 된다. 루터는 오늘날 작센과 튀링겐 지역의 설교자로도 활약했다. 7년여 동안 하루 평균 1.5번의 설교를 했는데, 당시 교통수단은 도보나 마차였고 엄청난 양의 저술, 교회활동, 각국 신학자들과의 편지 왕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도 계속 했기 때문에, 격무를 견디지 못하고 설교 중단을 선언한다. 그 후로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직접 설교를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남독일과 [[스위스]] 지역까지 루터의 의견에 공감하여 개혁 노선이 생겨났는데,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가 대표적이다. 이들 남독일 제국도시들과 스위스 동맹은 [[츠빙글리]]로 대표되는데, 초기 루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노선이 생겨났고, 1527~1529년 루터는 [[성만찬]] 관련 논쟁에서 이들 개혁세력들과 일치를 보지 못했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헤센]] [[방백]] [[필리프(헤센)|필리프 1세]]의 주선으로 [[츠빙글리]]와 루터파 신학자들이 모여 종교개혁 시기 당시 [[개신교]]의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성만찬]]에 대한 루터와 츠빙글리 상호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성경에 명시되지 못한 전통('''아디아포라''')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다. '''다만 잘못 알려진 사실로, 루터가 [[성상(조형물)|성상]] 철거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루터는 초기 구약시대 유대왕국 히스기야 왕이 [[모세]]가 만든 구리뱀을 작살낸 것처럼 성상도 철거할 수 있다 보았는데, 그렇다고 츠빙글리나 칼뱅처럼 성상을 적극적으로 금지한 것도 아니고 '''성상이 성경말씀을 대체하여 남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에 가깝다.'''[* 베른하르트 로제, 《마르틴 루터의 신학》 참조] 그리고 현재 루터교회에 성상을 사용하는 전통이 일부 남은 것은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등에서 황제에게 이단 논란을 피하려고 한 정치적 타협의 성격도 컸다. 루터는 성화를 어디까지나 미술품의 가치만 있을 뿐이지, 그것이 미신적 공경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교회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기를 들고 파괴하는 것은 아직 구습에 물든 믿음이 약한 형제들의 반발을 부르는데다가 '''상해와 재산피해가 동반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런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린 것이다. 특히 성상의 핵심중의 핵심인 예수 십자고상을 공공연히 반달하는건 일반 대중에게 사탄숭배자로 몰리기 딱 좋은 짓이라 성모마리아 형상을 치를 떨면서 혐오하는 오늘날 강경 개신교도들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따라서 교인들이 고상을 망치나 도끼로 박살내기 보다는 교회에서 위원회를 구성하여 단계적으로 순서를 정해 철거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급진적 개혁을 바라는 스위스와 남독일의 의견과는 일치하지 못했다. 그래도 제단에서 [[감실]]이 사라지거나 어느 정도 예배당 공간이 가톨릭보다는 간소화되는 등의 성과가 분명히 있었다. [[성만찬]]에 관한 입장은 실질임재설(Realpräsenz)[* 지금도 루터교 측에서는 이 표현을 선호한다.] 혹은 '공재설'(Konsubstantiation)[* 주로 가톨릭이나 칼뱅파 등 다른 개신교 교파에서 쓰는 표현]로 불리는 해석을 주장하여 기념설을 주장한 츠빙글리파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는 앞서 빵이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성변화)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했다.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루터든 츠빙글리든 '''"빵과 포도주 자체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는 어느 정도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루터의 경우, 이에 빵을 들어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최후의 만찬]] 말씀을 들었다. "빵과 포도주는 모양도, 맛도 분명 그대로지만 '''축성하는 순간부터는 완전한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임재하신다'''고 했는데. 루터는 축성한 순간 '이미 승천한 [[예수]]님이 사도들의 다락방에 내려오셨듯이' 빵에도 깃든다는 설명이었다. 종교 개혁 당시 츠빙글리 등으로 대표되는 스위스 지역의 개혁세력들은 네덜란드 인문학자 코르널리스 훈(Cornelis Hoen)의 기념설을 받아들여서, 아예 '변화'나 '임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는 증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니까 "'''밀가루 덩어리와 발효된 과일즙'''은 결코 혈액과 근육조직이 될 수 없다."는 것. 흔한 인식과 달리 개혁주의 개신교는 현대 기준으로도 꽤나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츠빙글리는 "내 몸이다."를 '나는 포도나무다'에서 [[예수]]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처럼, 몸 '''이다'''도 비유에 불과하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츠빙글리의 해석을 까면서 해석의 잘못됨을 거론했다. [[라틴어]] [[성경]]의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Hoc est Corpus Meum'' 을 따서 일명 '이다(est)' 논쟁이라고 하는데,[* [[독일어]]로는 Das ist mein Leib]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일지 비유로 볼 것인지는 당사자들에겐 단순 해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학이론의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 문제에서 서로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루터뿐만 아니라 [[츠빙글리]]도 이 부분의 해석에 완고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최근 연구로는 이전부터 개념 해석상 신학적 문제로 둘 사이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지금이야 합리주의 사조와 성서비평학 때문에 비유설이 우세하지만, 당시의 비유설은 스위스 부르주아 선진 식자층 자유시민들이나 이해할 것이었지 루터가 주로 상대하는 미신적인 농민들과 봉건제후들에게는 도저히 어필하기 힘들었다. 루터는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성상 배척도 성서를 근거로 겨우 해내는 판국에 영성체론 해석까지 급진적으로 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은 est 논쟁은 교리투쟁문제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에 따른 어른의 사정과 정치적 입장차이의 문제였던 것이다. 애초에 츠빙글리부터가 숙박업과 용병업을 교리로 금지하는 등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스위스 내부에서부터 심한 반발에 직면한 반면, 루터는 괜히 급발진하다가 반동세력에게 종교개혁을 방해할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제국 내 [[개신교]] [[종교 개혁]]은 둘로 양분되었다. 다만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는 서로 비판하긴 했지만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에게 적그리스도 취급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과 달리 완전히 관계가 끊어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신학적 견해에선 일치했기 때문. (루터 지지자들과 신교도 제후들은 정치적 연합을 위해 일치를 보려 했고, 루터의 완고한 태도에 매우 답답해했다.) * 마르부르크 회의의 일화가 있다. 루터는 원래 회의에 참석치 않으려 했으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 필리프 멜란히톤의 간곡한 요청과 이미 [[츠빙글리]]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못해 참석했다. 도착 후 회의 전야제에서 식사가 있었는데 츠빙글리가 루터에게 '''"당신의 목(견해)을 부러뜨려 놓겠다!!"'''는 선전포고를 했고, 루터는 '''" 흥! 여긴 [[스위스]]가 아니거든? "'''이라며 역시 부정적이었는데, 다음날 역시나 둘 사이의 견해 차이는 극복이 불가능했다. 양 진영의 논의가 치열해지자 루터는 돌연 테이블보를 빼고 식탁을 가리키며 퇴장했는데, 전날 분필로 적은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Hoc est enim corpus meum)'[* [[미사]] 중에 [[사제]]가 [[성체성사|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하는 말.]가 쓰여 있었다. 츠빙글리는 1531년 [[스위스]]에서 스위스 내 [[가톨릭]] 세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스위스는 1499년 슈바벤 전쟁으로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서 독립했는데, 스위스 일부 주(가톨릭)에서 그동안 원수급으로 치를 떨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SOS를 쳐서 [[카를 5세]]가 지원군을 보낸 게 컸다.] 루터는 "그들이 우리를 식인종[* 츠빙글리가 1531년 <신앙 해설>을 통해 루터가 '내 몸이다'를 근거로 빵이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한 것을 비꼬아서, "그럼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냐??"라고 했고, 스위스의 츠빙글리 지지자들도 "빵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냐?"라고 비꼬았다.]이라 한 것에 대해 심판으로 훈계를 받았다"며 씁쓸해 했다. [[성경]]과 복음에 대한 입장이 동일한 츠빙글리와 루터는, 바로 이 [[성만찬]]으로 인해 영원토록 틀어지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의식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기도 했다. 훗날 루터의 지지자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서서 영적 임재를 주장했고 스위스 쪽의 츠빙글리의 후학 칼뱅도 '영적 임재설', 그러니까 예수가 빵과 포도주에 '영적 상징'으로 그 안에 임재한다는 설을 제시했다. 자세한 것은 [[성만찬]] 참고. 츠빙글리가 죽고 나서 1536년 츠빙글리 진영의 마르틴 부처, 루터 진영의 필리프 멜란히톤,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주도로 두 진영 사이에 비텐베르크 신조(Wittenberg Konkordie)가 성립되었다. 서로 간의 견해 차이는 존중한다는 미봉책 수준의 신학적 견해 일치는 이루었으나, 양 진영은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다시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스위스]]와 [[독일]]의 종교 개혁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현대에도 스위스 개신교단(SEK)은 한국처럼 '''개혁교회와 감리교 위주'''로 되어있는데, 루터파를 거부했던 전통이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한편 가톨릭과 루터교의 양측 온건파는 최소한 1530년까지는 재일치를 위해 이를 악물고 타협하려고 노력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는 멜란히톤은 적어도 두 논점(평신도의 성혈 배령[* [[미사]] 때 [[사제]]만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고, 평신도들은 성체만 영한다. 다만 특별한 경우 평신도들도 성혈까지 영할 때도 있다(이것을 '양형영성체'라고 한다).]과 사제의 결혼)만 가톨릭이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고, 가예티노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두 논점이 신앙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규율의 문제[* 규율의 문제라는 가예티노의 답은 가톨릭 입장에서 교과서적인 답변이다. 흔히 오해가 많지만 사제 독신은 가톨릭교회의 교의가 아니라, 가톨릭교회 내부의 '라틴 교회'가 행하는 예법이다. 또한 중세 가톨릭 평신도들이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았던 것은 '빵의 형상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신다'는 신학을 드러내기 위한 '관습'이었다.]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루터의 반대("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8월 26일 작센 선제후에게 보낸 편지])와 가톨릭의 30년 넘은 느릿느릿한 대응[*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야 평신도의 성혈 배령을 다룸]을 하면 재일치가 실패했다. 이쯤부터 신교도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가톨릭 제후와 황제와 [[교황]]에 대적했고, [[종교개혁]]은 신앙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사건으로 루터의 영향력을 떠나게 된다.[* 다만 [[카를 5세]]가 워낙에 바쁜 몸이라 다시 10년간 [[독일]]에 나타나지 않았고, 1532년 합의로 새로운 [[공의회]]가 열리기 전 까지는 루터파의 제국추방령을 유보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제국의회에 제출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국추방령을 받은 루터가 아니라 멜란히톤이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 강목은 루터주의 신학과 [[가톨릭교회]]의 교리 중 같은 부분을 강조했고, 교황권과 [[7성사]], 교회 제도를 공격하지 않은 온건한 내용이었다. "멜란히톤이 주도한 이 신앙고백에 대해 루터도 적지 않은 불만을 지녔으나 코부르크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다만 1532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루터파 진영에서 협의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1537년 황제와 [[교황]]의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에 루터파를 초청했지만, [[이탈리아 반도]]에서 열리는데다가 [[개신교]] 참석인원은 [[가톨릭]]의 절반 이하로 제한당했고, 황제 또한 가톨릭 편에 기울어서 실효성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다. 1540년 필리프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의 콘타리니 추기경을 만나 상당한 신학적 합의를 이루었으나, 양측의 강경파들이 반발했고 루터와 교황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가장 큰 교리차이였던 [[이신칭의]] 문제는, 현대 들어 1999년 [[루터교회]]와 가톨릭이 의인(義認)에 대하여 상당한 접근을 이루었고 상징적인 발표도 했으나, 여전히 루터교회와 가톨릭 내부에서 모두가 승복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계속 대화가 지속되고는 있다는 것.] 특히나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9인 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온건파 콘타리니 추기경이 사망하고 강경파 카라파 추기경이 [[바오로 4세]]로 즉위하자 [[트리엔트 공의회]]는 초기 목적과는 달리 기존 가톨릭의 교리를 재확인하고 개신교 탄압을 결의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텐베르크에선 또 한 번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는데 아이슬레벤 대학 교수였던 요한 아그리콜라가 가톨릭과 논쟁을 벌이고 와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리하여 '''율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 루터는 오랜 동료였던 아그리콜라에게 율법이 필요 없으면 '''"간통을 하든 도적질을 하던 어디 해보슈. 어디 당신이 구원받나 봅시다"'''라 응수했고, 또 한번 격렬한 논쟁 끝에 요한 아그리콜라는 지지를 잃고 근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궁정의 [[목사]]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1539년에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가 개인적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하기는 했으나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절연하지는 않았고 영지내에서도 가톨릭 전통은 유지했다. 브란덴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이 마무리된 것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공인된 이후 요아힘 2세의 아들 [[요한 게오르크]]가 통치한 1560년대의 일이다. 다만 후술할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 사람들은 이 시기 개신교로 많이 돌아섰다.] 루터는 율법폐지론자들을 교황추종자와 다름없다며 경멸했는데, 재세례파 일부가 율법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더라도 율법상으론 여전히 우리는 죄인이며 '''완전히 의인인 동시에 완전히 죄인'''이라는 신학적 입장을 고수했다. 루터는 작센 선제후국에서 교회 설립, 신학서적 저술, [[목사]] 교육 등에 힘쓰는 한편 [[독일]]과 독일 밖의 여러 지방에서의 제후와 학자들의 편지 응답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자문과 신학적 대화와 교육 논박 등을 이어 나갔다. 초기에 뜻을 함께 했던 비텐베르크 인사들이 종교개혁이 퍼져나가며 각지로 파송되자 루터의 업무량은 비례하여 늘어났고, 이미 한계치에 다른 업무량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부터 격무에 시달렸기 때문에 나이까지 들어서 건강에 치명적이었다. 1530년쯤 나중에 사인이 된 심장발작이 일어났고, 딸 둘이 돌림병에 걸려 죽자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루터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몸과 함께 마음도 시들어갔다.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공인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루터파 탄압은 독일 각지에서 이어졌고, 재세례파의 봉기, [[오스만 제국]]의 위협들을 바라보며 점점 말세가 온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교황추종자, [[재세례파]], 유대인, 신비주의자들을 상대로 격렬하게 '모두 까기'를 시전했고, 개신교에 호감을 느끼나 황제를 두려워하여 종교개혁에 미적거리는 제후들도 신랄하게 까기 시작한다. 특히나 자신의 주적 로마추종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1546년 ≪악마에 의해 세워진 교황 지상권에 대하여≫라는 지금까지의 비판 수위보다 더 높은 원색적 수위의 글을 발표했고,[* 다만 욕설만 써있는 게 아니라 루터의 중요한 신학적 주장도 실려 연구가치가 있다고 한다.] 만스펠트 백작 가문의 영토 문제를 조정하고 화해를 주도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에 1547년 1월 조용히 사망한다. 죽기 전 자신의 지지자이자 루터파 신학자 유스투스 요나스가 "선생님은 지금까지 주님의 가르침을 선생님이 전한 것에 대해 확신하십니까?" 물었고 루터는 "예."라고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사망했다. 63년 동안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묘비에는 '신학박사 마르틴 루터 여기에 잠들다'란 간단한 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이 결실을 맺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있기 불과 9년 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